영화 장르 중에서 좋아하지 않는 장르가 있다면 나에게는 로맨틱코미디가 그렇다. 멜로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들은 대부분 좋아한다. 그런데 로맨틱코미디는 싫다. 처음에는 즐겼던 것 같은데 너무 공식화 된 로맨틱코미디 장르의 일관성이 그렇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인 것 같고, 이제 결혼 7년 차가 되어보니 "밀고 당기기"과정을 2시간 가까이 지켜보는 것 자체의 유효성이 없기도 해서 인 것 같다.^^


그런데 시라노연애조작단은 좋았다. 아마도 그 첫 번째 이유는 연애조작단이라는 소재의 참신함 때문일 것이다. 대체로 소재가 참신한 경우 주제에 연결시키지 못하고 소재만 우려먹다 끝나는 영화가 대부분이지만 시라노연애조작단은 소재는 주제를 이야기하기 위한 소스라는 당연한 원칙을 잘 지키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우려먹어도 좋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더불어 꽤 감정이입이 되고 저마다의 특색이 잘 살아 있는 캐릭터들도 좋았다. 개인적으로는 엄태웅이 연기한 병훈 캐릭터가 좋았다. 믿음은 사랑을 위한 기본적인 충족조건이라고 조금은 어렸을 적 생각했었고 그에 따른 과오도 있었던 지라 왠지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박신혜가 연기한 민영도 마음에 드는 캐릭터였다. 어렸을 때는 난 연약하고 청순가련형의 스타일이 좋다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철딱서니가 없는 편이라 실제로는 옆에서 타박하며 잡아주는 현명한 여자가 더 맞다고 지금은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의 와이프를 만나게 된 것인지도... (생각보다 박신혜씨 연기가 자연스러워서 좀 놀랬다)


어차피 멜로, 로맨틱코미디는 뻔한 이야기를 향해 달려간다. 시라노연애조작단도 믿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라는 당연하고도 뻔한 주제를 던지지만 문제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던지느냐에 있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대필을 하던 시라노, 시라노가 좋아서 연극을 꿈꾸지만, 연극을 하기 위해 연애조작단을 운영하고, 의뢰 대상자가 감정이 남아있는 전 애인, 현실에서 시라노가 되어 버린 주인공, 그리고 막판까지 시라노에만 향하던 관심을 다시 크리스티앙으로 전환시키면서 상용의 진심을 드러내는 것 까지... 참 절묘하다. 고백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결국 마지막 던지는 메시지는 같지만 그것을 어떤 과정을 거쳐서 던지느냐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처럼, 멜로, 로맨틱코미디는 과정을 어떻게 풀어가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생각한다. 시라노연애조작단은 그런 점에서 성공한 영화라 생각한다.

이 영화의 개인적인 최고의 장면은 카페에서 아그네스 발차의 우리에게 더 나은 내일이 되었네가 울려퍼지던 장면이 아닌가 싶다. 그런 상황에 놓인 병훈의 모습이 연애를 하던, 시작했던, 끝냈던 우리들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았다 생각되기도 해서 그렇다.

이 영화의 감독인 김현석 감독은 항상 만듦새가 좋고 의미 있는 작품들을 잘 만들어내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시나리오 작가 출신이기 때문에 이야기구조 자체가 좋다. 그런데 나오는 작품의 만족도에 비해서 흥행은 다소 안타깝다. 다음 작품은 대박도 한번 내면 어떨까 싶다. 명문대 경영학과 출신인 감독이 돈복이 많은 것 같지는 않다.^^



PS. 어제 어느 시나리오작가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졌다. 나이도 젋고 인정도 받는 시나리오 작가가 굶어죽다니... 내가 영화를 좋아하던 10년전에 비해서 산업으로서의 영화, 직업으로서의 영화는 여전히 제자리 걸음인 것 같다. 그래서 먹먹해진다. 영화를 좋아하면서 만났던 분들은 영화를 안해도 다들 성공하실 것만 같았다. 좋은 품성과 열정과 스마트함, 열린 마음을 가진 분들 이었다. 그런데 또 대부분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우리가 팝콘을 먹으며 편안하고 안락한 의자에 앉아서 영화를 보면서 얻는 기쁨은 그런 분들의 희생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영화를 하면서 입고, 먹고, 결혼도 할 수 있고, 아빠도 될 수 있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Posted by honeybadg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