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멜로 영화가 우리를 자극하는 것은 그 멜로 영화들이 일종에 환타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바라는 감상적인 혹은 이상적인 사랑에 대한 생각들을 보여줌으로써 영화속의 주인공의 연애담 혹은 애정의 과정이 바로 우리의 이야기가 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멜로물은 대부분 상큼하고 항상 밝으며 남,녀 주인공은 미남미녀 혹은 절대 매력덩어리들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멜로 영화들은 영화자체의 주인공들의 정신적 교감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들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위한 영화처럼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고민하며 결국에는 진한 키스 혹은 포옹으로 그들의 사랑이 완성되었음을 선언하며 우리들의 마음을 안도하게 한다. 즉 영화 속 주인공은 우리들의 멜로물에 대한 환타지를 실현하기 위한 대상일 뿐이다. 바로 이 점이 개인적으로 로맨틱코메디물을 대단히 싫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만일 대부분 로맨틱 코메디속 만큼의 고민과 갈등만이 존재한다면 난 절대로 어떠한 사랑이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사랑만큼 쉬운 것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지만 현실 속 우리들에게 사랑은 대단히 어려운 부분이며 사랑을 통한 행복만큼이나 힘든 짐이 양 어깨를 짖누른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우리들이 연인과 멜로 영화를 보는 것은 바로 두 사람이 바라는 애정에 대한 환타지에 근접조우하는 것이며 그 환타지를 통해 대리만족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현실속의 우리들은 영화 속 주인공 처럼 선남선녀도 아니고 성격도 좋지 않으며 부와 권력을 소유했거나 매력적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과 영화 속의 환타지의 갭을 절감하고는 절치부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이 척박하고 절박한 현실속에서 어떻게 하면 절대사랑을 발견하고 보존할 수 있냐는 말이다. 이 질문에 해답을 얻고 싶은 이가 있다면 난 오아시스를 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오아시스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환타지다. 물론 이 환타지는 영화에 우리가 기대하는 환타지가 아니라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혹은 가슴 속 깊은 곳에 담아둔 그 혹은 그녀의 환타지이다. 즉 영화 속 주인공들의 정신적 환타지를 통해 우리시대의 사랑을 사유하고 있는 영화가 바로 오아시스다. 오아시스가 우리들이 바라는 환타지라고 보기에는 너무 절망적이다. 전과3범의 전과자와 뇌성마비 여인의 사랑이 어찌 밝고 쾌활할 수 있겠는가? 보기에도 부담스러울 수 있다.-이 부분에서 전과자와 장애인에 대한 폄하는 절대 아니다.-하지만 오아시스는 그 둘을 통해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아니 절대 유효한 사랑에 대한 명제를 길어올렸다. 그 명제가 내내 가슴한켠에 남는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여주인공 공주의 방 벽에 걸려있는 오아시스 걸개가 한참동안 스크린에 걸려있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지나지 않아 그 오아시스가 다름아닌 공주의 환타지이며 공주는 현실속에서 이 환타지를 의지하며 살아간다. 집안 구석구석을 비추는 거울에 반사된 빛을 하얀비둘기로 상상하거나 나비로 상상한다. 그런 그녀의 삶에 종두가 들어선다. 종두는 대단히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인물이다. 악마적이며 선한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장소와 시간에 따라 다른 스펙트럼의 색깔을 내는 인물이다. 물론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천성이 그런 것이다. 난 그런 종두를 보며 마치 미운 세살의 사내아이라는 생각을 했다. 바라는 욕구는 충만하나 그 욕구의 해소가 결국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는 하지만 그의 본심은 선한... 그런 인물이 종두다. 그가 공주를 만난 것도 바로 그런 그의 천성에서 기인한다. 그의 형이 사고로 죽인 사람의 가족을 찾아가고 공주는 그의 형이 죽인 사람의 딸이다. 후에 밝혀지지만 종두는 그의 형을 대신해서 감옥을 간다. 그런 그가 피해자의 가족을 방문하는 상황판단 미스의 행동을 하는 것은 그의 선한 면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공주를 그는 다시 방문해 강간하려 한다. 그리고는 실신한 공주를 보며 이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다. 정말 세살 먹은 사내아이와 거의 흡사한 성향이다.

 

하지만 종두와 공주는 이내 서로의 마음에 서로를 담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것은 서로가 연인으로 시작하는 대목에서 둘이 나누는 대화다. 공주에게 종두는 공주치고는 좀 그렇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장군인 홍경래의 십 몇 대 손이라고 하자 공주는 홍경래는 장군이 아니라 반역자라고 한다. 실없이 웃던 종두는 공주에게 공주마마라고 부르겠다고 하고 공주는 그럼 자신은 종두를 장군이라 불러야겠다고 한다. 이 부분이 재미있는 것은 서로 연인으로서의 시작이 상대방의 환타지를 실현시킴으로써 시작된다는 점이다. 뇌성마비인 공주는 실제로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공주와 거리가 멀다. 그런 공주에게 있어서 실제 공주는 일종의 환타지다. 그리고 마음이 끌리는 공주에게 자신이 장군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종두에게 장군은 종두의 환타지다. 그런 서로에 대한 환타지를 종두와 공주는 마마와 장군이라는 칭호로서 실현시키고 이내 사랑하는 대상으로 서로를 생각하게 된다.


이 후 영화는 에밀쿠스타리차 감독의 영화처럼 서로에 대한 환타지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진행한다. 공주는 장애인과 정상인의 모습을 넘나들며 그녀의 환타지를 실현하고 그것은 또한 종두의 환타지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나뭇가지 그림자에 대한 에피소드다. 공주의 방에 걸려있는 오아시스의 걸개는 공주의 환타지를 상징한다. 즉 그녀가 장애인으로서 겪는 아픔과 현실의 고통을 이기게 하는 환타지다. 그런 환타지를 나뭇가지 그림자가 가리고 있다. 종두는 그런 그녀를 위해 말도 안되는 마법을 건다. 그 마법은 종두의 환타지일 뿐이지만 상대방인 공주에게는 실재로 효험이 있는 환타지다. 즉 제3자가 보기에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오직 둘만의 환타지인 것이다. 실제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그 둘에게는 실제의 것과 동일하다.

 

하지만 그런 그 둘의 애정을 현실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아버지를 죽인 종두를 공주의 가족입장에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으며 장애자인 공주를 종두의 가족은 절대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에 공주와 종두의 애정은 종두의 가족에게는 형에 대한 복수이며 공주의 가족에게는 강간이다. 그렇게 그 둘의 애정은 현실에 의해서 가장 참혹하게 찢겨져나간다. 사랑하는 상대의 가족은 경찰서에서 만나고 합의금이라는 돈을 이야기 하고 공주와 종두의 사랑에 대한 행동은 강간으로 규정된다.

감옥을 가게 되는 종두는 이제 마지막으로 공주의 환타지를 현실적인 행동으로 실현시킨다. 그녀의 방에 드리우는 나뭇가지를 경찰서를 탈출해서 잘라낸다. 그리고 그런 종두에게 공주는 라디오를 크게 켜며 존재를 알리고 마음을 전한다. 이 때 종두의 나뭇가지를 자르는 행동과 공주의 라디오 소리는 서로에 대한 감동적인 애정의 표현이지만 둘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정신나간 짓이며 소음공해일 뿐이다.

 

그렇다. 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행동과 환타지는 오직 둘에게만 의미가 있으며 그것들은 대단히 자주 현실에 의해서 파괴되며 현실에서는 이해될 수 없다. 오아시스는 결국 사랑이란 사랑하는 그 혹은 그녀의 환타지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말한다. 아니 실현시켜 줄 수 없어도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겠냐고 말한다. 그 감동적인 메세지가 내내 가슴에 남겨지는 것은 그 메세지가 절대 유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제로 자신의 환타지를 상대에게만 바랄 뿐이지 상대의 환타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리고 결국 상이한 환타지의 충돌은 사랑에 대한 파국으로 치닫거나 갈등을 야기한다. 우리가 상대방의 환타지를 실현시켜 줄 때 혹은 그러려고 노력할 때 아마 서로는 서로에게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아시스가 그려내는 현실은 너무 사실적이다. 그 사실적임은 등장인물에 의해서 형성된다. 종두의 형과 동생은 물론 공주의 가족들도 적당히 악하고 적당히 선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에 오아시스가 그려내는 현실은 매우 사실적이다. 작위적이지 않고 사실적인 상황의 설정과 다른 멜로물과는 다른 주인공들의 정신적교감에 집중함으써 오아시스는 대단히 의미있고 좋은 영화가 되었다. 더구나 오아시스가 전하는 메세지는 강력하다. 오아시스는 이창동 감독의 저력과 힘을 보여준 대단한 영화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 하다.

 

오아시스는 현재 흥행에도 성공하고 있는 듯 하다. 곳곳에 등장하는 유머는 사실적이면서도 영화의 감칠맛을 더해주고 이창동 감독과 설경구라는 브랜드가치는 이 영화의 힘이다. 더불어 전 언론의 집중적인 애정공세 또한 만만치 않다. 향후 이 영화가 얼마만큼의 흥행성적을 보여줄지는 대단히 궁금한 사항이다. 영화는 대단히 좋지만 관객들이 대부분 갖고 있는 이미지에 비한다면 너무 어둡고 더불어 너무 사실적이다. 누군가 말한 것 처럼 메세지는 따뜻하지만 영화는 너무 차갑다. 어쩌면 오아시스의 흥행은 한국영화가 산업적으로 발전한 것만이 아니라 관객들의 영화를 보는 눈 또한 다양해졌는가?의 검증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진 한국영화의 환타지를 위해서 이 영화가 흥행에서도 성공하기를 바란다.

 
2002년 8월 18일에 쓴 글: 지금의 와이프가 참 좋아했었던 기억이...


Posted by honeybadg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