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단한 사회학자도 아니고 세상의 돌아가는 이치를 냉철히 분석하고 향후 방향성을 고찰하여 이상적인 모습을 고민하는 이도 아니지만 분명 이 세상은 가끔 비극의 종단으로 치닫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개인과 개인은 철처하게 파편화되어 자신의 안위나 이기가 걸린 문제가 아니면 타인의 어떤 일에도 방관하며 신문지상에는 인간으로서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온갖 하드고어적인 범죄들로 뒤덮혀 있다. 과연 이런 세상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그 범죄의 중심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보면 결국 나 또한 나의 육신을 빌어 태어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의 당위성을 지워버리고 싶기도 하다. 그렇다. 이 부분에서 데이빗 핀처 감독은 두 형사와 연쇄살인범의 심리적 추격전을 빌어 훌륭한 작품을 하나 만들어냈다. 그것이 바로 영화 <세븐>이다.


 1. 캐릭터의 동일성 그리고 대체화

이 영화는 캐릭터의 이해가 굉장히 중요한 영화다. 그리고 그 캐릭터들은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를 훌륭하게 대체하고 있으며 그 캐릭터들이 범죄로 뒤덮힌 그리고 해체된 도시라는 공간에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성을 갖는다. 먼저 브래드 피트가 분한  밀즈경사는 바로 막연하게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대체한다. 그는 애써 청원을 해서 도시로 이직해 온다. 그리고 그는 다소 열띤 목소리로 외친다. " 그 사건은 내가 맡겠습니다" 그는 어찌 보면 희망을 천성적으로 믿고 있는 이로 보인다. 그는 경찰이고 경찰은 정의의 편에 서있기 때문에 사건의 결과는 자신의 승리로 귀결될 것이라 믿는다. 그에게는 사건의 의미성과 비극성보다는 사건을 일종의 정의를 위한 게임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검식장에서 어이 없이 "멋지게 수사해봅시다"라고 블럭버스터의 형사의 대사를 내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는 냉철하기보다는 감정적이며 그의 체내에 농축되어 있는 막연한 희망은 결국 그를 비극의 중심으로 이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며 막연한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 그리고 언제나 정의는 존재하며 신을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선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어깨에 신이 함께 할 것이라 믿는다. 그렇기에 세상의 범죄에 자신은 예외일거라 믿으며 온갖 극악한 범죄에 거품을 물고 흥분한다. 그리고 자신과 범죄자는 결코 같은 부류의 인간이 아니라 믿는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서 밀즈처럼 우리 또한 결국 이성적이기 보다는 감정의 풍파속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모건 프리먼이 분한 서머셋 경사는 이 세상의 선구자쯤으로 보인다. 그는 경찰이면서도 썩어빠진 그리고 피폐해져가는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를 유일하게 지속시키는 것은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자신의 삶의 규칙과 지적유산들이다. 서머셋 경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는 잘 다려진 옷을 입고 소지품을 가지런히 정렬해 놓고 하나하나 이를 챙긴다. 그리고 메트로놈 소리로 잠을 청한다 이는 그의 규칙데로,정상적으로 움직이는 세상에 대한 갈망을 보여준다. 즉 그는 이 세상에 대한 자신의 대결방안을 실수가 없는 삶의 습관과 지적인 능력을 배양함으로써 버텨내려 한다. 그의 그러한 모습이 영화 내내 일정정도 훌륭한 대처방안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그러한 서머셋 경사도 결국 메트로놈을 집어던져버리고 마지막 연쇄살인범의 함정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밀즈의 부인인 트레이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결단코 지켜내야할 존재로 보인다. 그리고 또한 그녀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 즉 그녀는 소중한 존재이며 생명이라는 인간의 영원불멸하며 가장 기본적인 희망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결국 그녀가 희생당하자 밀즈는 살인범의 마지막 함정으로 기꺼이 걸어들어가며 서머셋 또한 그런 밀즈를 강력하게 제지하지 못한다. 그녀의 죽음은 바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즈와 서머셋 그리고 케빈 스페이시가 분한 살인마는 결국 하나의 공통된 인식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신의 영역에 속하기 보다는 악마의 영역에 속해 있다는 점이다. 세상은 그래도 살만한 것이다라고 천성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밀즈 조차도 마지막 가장 소중한 존재의 상실에 기꺼이 악마의 영역에 발을 내딛으며 냉철한 서머셋도 판단을 보류하며 밀즈에게 총을 건네라고만 한다. 결국 <세븐>의 캐릭터들은 이 세상의 인물들을 훌륭하게 대체하며 또 동일하다.

 

2. <세븐>의 세계관

<세븐>이 이야기하고 있는 세계관은 너무 절망적이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살인범의 마지막 과업은 완수되지 못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 과업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수되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 과업은 대부분의 영화에서 과업의 실행의 중지라는 임무를 띄고 있는 형사에 의해서 달성된다. 이 마지막 장면을 통해서 결국 이 세상에는 어떤 희망도 없음을 역설하고 있다. 만일 정말 이성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면 그리고 우리 인간이 완벽한 사고체계를 갖고 있다면 마지막 밀즈 경사는 살인범을 죽여서는 안되었다. 하지만 밀즈 경사는 그를 탄창의 총알이 빌때까지 쏘고 만다. 그렇지만 과연 그러한 밀즈 경사의 행동을 영화를 보는 모든 관객은 심정적인 동의를 했을 것이며 쏴버리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의 장면처럼 어떤 감흥도 없다. 영화속에서 밀즈경사가 살인범에게 총격을 가하는 장면은 너무 건조해서 그리고 어떤 감정도 파고 들지 않아서 후련하지가 않다. 결국 우리는 밀즈를 통해서 소중한 존재의 상실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음에도 그에 따른 어떤 보상을 얻을 수가 없다. 그렇게 영화는 절망적이다. 마지막 서머셋 경사의 머룰러 있는다는 말에 어떤 희망을 갖을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지금까지 진행되어 오던 영화<세븐>과 가장 동떨어진 장면으로 기억된다.


 

3. 고급스릴러물

영화 <세븐>은 이상하게도 굉장히 고급스럽다. 이는 절대적으로 데이빗 핀처의 영화적 형식에서 기인하는데 영화의 시작에 등장하는 살인범의 스크랩 과정과 전반적인 세트의 구조. 전체적인 갈색 색감 그리고 단테의 신곡의 7가지 대죄악을 모티브로 차용함으로써 지적이면서 고급스러운 스릴러 물을 만들어냈다. 더불어 밀즈 경사와 서머셋 경사의 의상은 언터처블의 조지오아르마니의 의상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 묘한 기품이 있다. 분명 이는 이 영화의 상업적 힘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상업적 힘과 CF 감독 출신으로서 고급스러운 바비주얼과 형식들은 영화의 전체적인 메시지와 효율적으로 어울린다. 다시 한번 데이빗 핀처의 상업적 비주얼 형식과 나름의 메시지의 결합의 힘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가 바로 <세븐>이다.

 

영화 <세븐>은 의미있는 사회에 대한 메시지와 데이빗 핀처의 훌륭한 영화적 양식들이 결합되어 탄생된 괜찮은 영화임에는 분명한 듯 하다.

2002년 6월 17일에 쓴 글: 이 영화에서 브래드피트의 스타일이 참으로 멋있었다.

Posted by honeybadg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