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라는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영화를 본 것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정보를 접했을 때- 가장 경이적이었던 것은 단편 4개를 모아 하나의 장편으로 만들었다는 점과 그런 다소 빈티나는(?) 영화가 버젓하게 개봉관에 걸리고 확대 개봉되었다는 사실이다. 무엇일까 무엇이 이 영화를 한 여름의 핫 이슈로 만들었을까? 나의 궁금증은 그 지점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영화를 내 골방에서 만나게 되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1. 모든 영화 형식들의 만남...

영화안에는 모든 영화적 형식들이-요즘 한창 유행(?)하고 있고 영화 매니아들이 좋아할 요소들- 가득차 있었다. 성룡의 프로젝트A 류의 액션과 타란티노의 걸죽한 입담과 왕가위의 현란한 비주얼들이 곳곳에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처받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소외받은 군상들이라니... 이것에 너 그거 다 네거 아니잖아! 라고 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영화적 식견이 그리 훌륭하지 않은 나는 어느 부분에서 누구의 무엇이 쓰여졌는지도 분간을 못하니 더 할 수도 있다. 물론 독창적인 창조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민다면 당연하게 비판의 논조는 당위성을 얻는다. 하지만 류승완 감독은 자신의 영화안에서 자신이 좋아하는형식들을 펼쳐놓고 즐거워하고 즐기는 것은 아닐까?

 

류승완 감독은 인터뷰에서 성룡의 열혈팬임을 누누히 말했고-그의 최고의 희망은 성룡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는 것이라고 한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마지막 장면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걸주한 욕으로 대사를 도배한 것은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의 초반 맥도날드씬에서 따온것이라고 한다. 더불어 류승완의 액션은 철저하게 성룡의 액션과 닮아 있다. 류승완은 그가 좋아하는 모든 영화적인 것들을 모아두고 그 안에서 이런저런 실험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거침없이 영화에 뿌려대고 마음껏 장난을 치며 즐거워 할 수 있다는 것. 그 안에서 자신의 영화에 대한 고민들과 실험들을 한다는 것. 그것이 정말 멋진 일이다. 단편이라는 영화안에서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것을 창조하는 것만이 과연 의미가 있으며 세상에 그런 영화들이 과연 얼마나 있던가? 잘난체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모아서 실험하고 있는 류승완 난 솔직히 그가 부럽다.


 

2. 과연 그것이 전부인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형식들의 모음 그리고 실험 그것이 전부인가? 영화속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패싸움

 

당구장에서의 패싸움으로 인한 우연한 사고! 그런데 이 단편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공고생과 예고생이라는 타이틀이다. 인문계 고딩이 아니라 비인문계 고딩이다. 이것은 사회의 공통적인 통념에는 빗나간 계층이다. 묘한 기분이 흐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의리에 의한 패싸움.... 그 싸움의 원인이 과연 한 친구가 다른 고등학교 친구에게 맞았다는 사실이었을까? 그것은 아니다. 그 나이의 그들과 우리가 그 상황에서 풀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혈기왕성한 액션이 최고의 덕목이었지 않은가? 그렇게 만든 것은 비주류라는 계층의 묘한 도덕적 룰이었다.

 

악몽

 

출소한 그의 사회 적응기 결론적으로 그의 적응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는 자신의 과오를 그 누구보다 죄스러워하고 벗어나고자 한다. 그는 폭력적인 성향의 인간이 아니라 도덕적인 한 인간이었다. 그런 그의 적응은 또 경찰이라는 주류에 의해서 실패하고 패싸움의 원인이었던 형사가 된 친구는 생을 깐다.-왜냐구? 형사의 친구가 살인자라는거 인정하는 진보적인 경찰이냐구? 우리 경찰이...- 결국에는 그가 그토록 죄스러워 하던 살인으로 치닫는다.

 

현대인

 

그럼 그를 생깐 형사가 된 친구와 그의 대치점에 선 그의 보스의 활극! 둘이 하나는 범죄자 그리고 하나는 정의의 형사라고 해도 그 둘이 달라보이지는 않는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하나는 주류의 룰을 어기고 적응하고 하나는 주류의 룰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둘은 같아보이고 둘 다 불쌍해 보이는지... 그 짧은 단편이라는 시간적 제안안에서 이 이야기를 이 토록 잘 풀어낸 영화가 있던가?

내 기억에는 없었다. 성룡의 액션으로 도배를 했다고 해도 인터뷰 형식의 차용이라고 해도 봐라! 성공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세대를 넘어선 주류의 피해자. 이제 엇갈린 주류의 저주는 세대를 넘는다. 그리고 공멸의 길로 치닫는다. 그와 그의 형사 친구 그리고 친구의 동생... 갠적으로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다. 그와 그의 형사 친구는 모든 사건의 근원이었던 당구장에서 하나는 실명으로 하나는 죽음으로 이어지는 혈투를 벌이고 그의 동생은 영문도 모르고 깔에 맞아 죽어간다. 이쯤되면 단편의 처음과 단편의 마지막은 일관된 형식으로 진행된 바 없음에도 완벽하게 맞아떨어지고 감동은 배가된다. 형이라는 마지막 대사는 주류의 룰을 어긴 죄값이(?) 형에게서 동생에게로 다시 순환되고 이는 다시 다른 누군가에게 순환된다는 것이 아닐까?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류승완 감독의 독창적인 것이 한 치도 없다고 해도 좋다. 그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적재적소에 자리매김을 하고 있고 그가 말하고자 한 메세지는 증폭되어 다가온다. 형식의 모음과 실험 그안에서 류승완이 이룬 것은 이것이라고 본다.
 


 

3. 그리고...

영화는 전설했지만 한 개봉관에서 서울 시내 다른 개봉관으로 확대개봉이 되었다. 그리고 비디오 대여순위도 상위권에 랭크되어 있다. 이것을 가지고 역시 상업적이군하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공식이 되고 대안이 되지 않을까? 단편도 그리고 언더의 감독도 대중과의 소통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좋게 말해서^^ 그리고 그를 통한 어느 정도의 자본의 도움이 수반되지 않을까? 적어도 류승완 감독은 이 영화를 상업적으로 팔아먹으려고 하지는 않았을거다. 그렇다면 그의 형식의 장난과 실험은 상업적으로도 성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중요한 의미성을 가진다고 난 생각한다.

2000년 10월 26일에 쓴 글: 아마 토론이 있어서 다시 재정리해서 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Posted by honeybadg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