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안노 히데야키'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인생은 꼴라주다' 당시 그의 작품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대해서 그 동안 등장했던 다른 애니메이션의 차용 혹은 변주다 라는 의혹 혹은 의문에 대한 그의 답이었다.

아마도 그의 이 답변은 지구상에 '어느 작품도 순도 100%의 순수성을 갖을 수는 없으며, 창조적 모방 혹은 모방을 통한 창조가 있을 뿐이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모든 작품이라는 말 대신 인생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즉 한 개인의 작품도 그리도 우리들의 인생도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의미 또는 일반적인 통념이라고 하는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어떤 개념에 의한 꼴라주일 뿐이라는 의미로 확장해서 해석이 가능할 것도 같다.'포스트 홍콩 느와르' '홍콩 느와르의 밀레니엄 버전'이라는 극찬속에서 개봉을 한 유덕화, 양조위 주연의 '무간도'를 이야기하기 전에 전혀 상관없는 안노 히데야키의 일갈을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인생은 꼴라주다'라는 그이 답변만큼 이 영화를 훌륭하게 설명할 말은 없다는 생각에서다.

만일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누군가 앞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어떻게 소개할까? 아마도 다음과 같은 소개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 안녕하십니까? 00회사 마케팅팀 000입니다." 혹은 " 안녕하세요? 00대학 국문학과에 재학중인 000입니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소개말을 좀 나누어 보자. 00회사, 00대학은 소개를 하는 사람이 속한 공간이고, 마케팅팀, 국문학과는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소개하는 이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간과 하고 있는 일로서 자신을 꼴라주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마케팅적으로 이야기를 조금 해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 세상에 존재하는 브랜드들이 왜 그 브랜드 하나만으로 판매가 되고, 명품 브랜드들이 선호되는가?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브랜드로 형성화하기 때문은 아닐까? 이때 자신이 입고, 마시고, 살고, 타고 하는 모든 브랜드들은 자신을 꼴라주하기 위한 조각들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무의식 중에 혹은 의식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꼴라주의 단편들을 붙이고 자르고 이어나가면서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세상속에서 자신의 정체성! 그렇다. 무간도는 바로 정체성에 대한 영화다.

 


무간도에서 주인공 유건명과 진영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유건명은 조직의 일원이었으나 조직의 지령으로 경찰대학에 입교해 경찰이 되서 현재는 반장이다. 즉 그는 자신의 정체성인 조직의 일원이라는 심분을 숨기고 경찰 내의 정보원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이다. 반대로 진영인은 경찰이지만 경찰의 신분을 숨기고 10년간 조직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간단하게 보면 직업을 숨기는 것인데 그것이 왜 정체성과 결부되는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직업은 단순하게 재화를 얻기 위한 노동의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형성하는 가장 강력한 콜라주의 조각이다. 더불어 조직원과 경찰 만큼 서로 반대편에 서 있으며 그 의미가 극명한 것은 없다. 경찰이 빛의 세상이라면 조직원은 어둠의 세상이다. 10년 동안 서로는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의 반대편에서 살아간다. 오직 그들의 올바른 정체성을 아는 것은 경찰국장과 조직의 보스 뿐이다. 작전 과정에서 이제 서로는 각 자의 진영에 자신과 동일한 처지에 있는 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이 부분은 마치 첩혈쌍웅에서 주윤발과 이수현이 교감과도 같지만 그 교감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주윤발과 이수현의 교감이 감상적인 우정이라면 유건명과 진영인의 교감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느 순간에 드러낼 여지를 가진 건조하고 치명적인 관계다. 그것이 결국 그 둘을 비극으로 몰고 간다.

 

 유건명의 연인은 소설을 쓴다. 그녀의 소설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유건명과 진영인을 형상화하는데 그녀는 그렇게 말한다. 실제로는 착한 사람인데 나쁜 일을 행하면 그는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이 말처럼 유건명과 진영인은 본질적으로는 착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드러낼 수 없다. 외면적으로는 정의를 수호하지만 내면은 조직원인 유건명이나 실상은 경찰이지만 조직원으로 살아가는 진영인에게 선함과 악함의 기준은 모호할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다. 진영인의 정체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국장이 살해됨으로써 진영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길이 없다. 그리고 유건명은 자신의 보스를 죽임으로써 이전의 정체성을 버리고 새로운 빛의 세상의 정체성을 얻으려한다. 진영인은 조직원이기에 자신의 옛여인과 헤어져야했고 자신의 딸을 알아보지 못하며, 정신과 치료의사의 의자에서만 편안한 수면을 얻을 수 있다. 그의 10년간의 고통은 바로 잃어버린 그의 정체성에서 기인하며 이제 그 정체성을 찾고자 하지만 그의 정체성을 되찾아 줄 유일한 이는 세상에 없다. 유건명은 전도유망한 반장으로서 사랑하는 연인과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려 한다. 그에게 조직원이라는 원래의 정체성은 현재의 행복을 빼앗아갈 뿐이다. 그가 자신의 보스를 살해하는 것은 새로운 자신의 정체성을 얻기 위한 유일한 수단인 것이다.

 


결국 유건명의 새로운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과정, 진영인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한 과정은 비극이 되고 만다. 진영인은 엘리베이터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 그리고 유건명은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은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거짓으로 착한 정체성을 지킨 유건명은 과연 착할까? 그렇지는 않다. 결국 그 둘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무간(무간지옥)은 바로 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무간도에서는 오직 고통만이 존재하며 그 고통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결국 이 지옥과 같은 이 세상은 우리의 정체성을 찾고 유지하는 그 모든 과정이 고통일 뿐이며 착함이라는 정체성은 허락되지 않는다.

무간도는 그 동안 몽환적인 감상과 과장으로 만들어낸 홍콩느와르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이전 작품들과는 다르게 대단히 건조한 영화다. 변변한 총싸움도 없고, 진영인이 죽음에 이르는 씬을 보면 그렇다. 더불어 우정, 의리와 같은 진부한 테마에서 벗어나 홍콩느와르라는 장르를 통해 극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까지 꽤 빼어난 수작인 듯 하다.

 

2003년 4월에 쓴 글: 홍콩영화의 부흥이라는 생각에서도 꽤 반가웠던 영화

 

 


Posted by honeybadg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