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사이코는 갠적으로 [존 말코비치]되기라는 영화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은 듯 하다. 정체성이라는 부분에서 상당히 동일한 주제 의식을 던지고 있다. 더불어 미국 뿐만이 아니라 현재 잘 살단다고 하는 선진국 모든 몽매한 우리들에게 던지는 이야기는 아닐까? [아메리칸 사이코]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다른 누구도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가 자신을 형성화 시키는 것은 온갖 종류의 미용용품과 고가의 브랜드이며 더불어 깍아놓은 듯한 육체다. 더불어 그의 주의에서 그의 친구들과 동료들도 그가 형상화하기 위해 준비한 것으로 그를 인식한다. 그렇기에 동일한 브랜드의 옷과 안경을 착용하는 다른이와 주인공을 헷갈린다. 그 모든 외면화된 이미지속에서 주인공은 일탈을 꿈꾸고 또는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서 그것이 가상 살인으로 치닫는다는 것이 아메리칸 사이코의 이야기다.

 

현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연 우리 자신의 고유한 이미지와 개성은 무엇으로 드러나는가? 그것은 바로 대단위의 마케팅으로 소비자에게 인식되는 어떠한 상품으로서,그 안에 들어있는 이미지로서 자신의 이미지와 개성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은가? 다분하게 꾸며진 헝겊조각이 그리고 화장품이, 신발이 그를 형상화 하는 것이다. 영화속에서 명함이 등장하는 씬에서 그러한 것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명함에서 중요한 것은 그 명함에 들어있는 명함 주인의 이름과 개인 신상정보가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영화속에서 명함은 그것이 아닌 디자인과 재질과 같은 제품의 이미지가 중요하게 되어버린다. 바로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명함의 가치가 자신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명함의 가치의 높고 낮음에 따라 서열이 매겨지고 그래서 영화 속 등장인물은 카드게임에서 상대방의 패에 의해 지고 이기는 상황과 같은 일이 발생한다.

 


주인공 또한 자신보다 낮다고 생각하던 등장인물이 자신보다 좋은 명함을 꺼내자 이성을 상실하고 화장실에서 그를 살해하려고 한다. 이쯤되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세상이 규정하고 있는 이미지 밖에는 없다. 어느 곳에도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드러낼 것은 없다. 하지만 세상이 규정하고 있는 이미지라는 것은 자본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자본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이미지는 고급과 저급으로 구분된다. 즉 자본의 많고 적음은 자신의 정체성과 개성의 높고 낮음의 기준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안에서 주인공은 노트안의 낙서로 살인을 저지르고 그 살인을 통해서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한다. 자본의 성전이라는 미국에서 탄생한 영화 속 아메리칸 사이코는 이제 자본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모든 국가들의 유니버설 사이코와 다를바가 없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웅성웅성하는 관객은 영화의 내용을 잘 이해를 못했다. 하나의 판타지적인 살인이었는데 그것을 잘 모르고 있는 듯 했다.-아님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나?^^ [아메리칸 사이코]의 그 처럼 반전의 묘미가 숨겨져 있어서 관객을 한 번 움찔하게 만들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참신한 소재와 꼭 현재의 시류에 던지는 적절한 메세지가 아니었던가 싶다.

2000년 12월 3일에 쓴 글: 크리스찬 베일을 처음 만났던 영화


Posted by honeybadg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