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에 친구와 오토바이를 탄 적이 있다. 당시 넘어진 적이 있는데 오른 무릎에 그 때의 상처가 아직도 흉터가 되어 남아 있다. 그 녀석과 친해진 계기도 오토바이였지만 그 녀석을 하늘나라로 보낸 것도 오토바이였다. 가끔 내 무릎에 상처를 볼 때면은 그 녀석 생각이 나 잠시 숙연해지고 슬퍼지곤 한다. 박하사탕은 그런 영화다. 가슴속에 남아있는 흉터같은 영화. 그 흉터를 볼 때마다 지난간 과거의 아픈 기억이 새삼 가슴을 슬픔으로 져미는 그런 영화가 바로 박하사탕이다.

 

내가 박하사탕을 보고 처음으로 들었던 생각은 죽었다 깨어나도 난 박하사탕을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거다. 역사의 아픈 기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그 시대를 살았던 80년대의 지식인들과 권력의 오도와 은폐속에서 거짓을 진실이라 믿고 살았던 민중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박하사탕을 보고 영화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알고 있는 80년대의 광주는 사회과학역사서에서 피상적으로 보았던 지나간 과거의 과오이지만 그 당시에 대학교를 다니던 나와 같은 대학생들에게는 살아가며 계속 자신을 괴롭히는 역사의 비겁한 자신의 초상이며, 민중에게는 살을 도려내는 아픔이기 때문이다.

 

광주사태가 한창일 때 이창동감독은 아무 것도 모른체 친구들과 고스톱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 격동의 시간을 그렇게 보낸 그리고 무기력한 자신의 한심함을 속죄하기 위해 그리고 아직까지도 광주사태의 주범이 정계에 버젓이 앉아 있는 현재에 일타를 가하기 위한 영화가 박하사탕이 아니었을까?


 

영화는 현재에서 과거로의 여행을 한다. 피폐한 그리고 속세의 때가 덕지덕지 묻은 한 개인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며 그가 얼마나 순수하고 더불어 인간적인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주체적인 그의 삶을 살았는지 모르지만 그가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고 그런 그의 모습은 가상화 된 인물만의 것이 아니라 모습이 바뀌었을 뿐이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고 난 후 삶을 살아가다 영화를 다시 떠올리곤 이내 가슴 한 켠이 자꾸만 무엇인가에 옭재어 온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은 바로 그런 영화다. 물론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이창동 감독만의 독특한 형식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영화적 구성이 탁월한 것도 아니다. 시나리오를 충실하게 그리고 묵묵하게 찍어나간다.

하지만 시나리오의 탁월함이 어떤 영화적 구성보다도 앞선다. 그런 그의 영화가 우리의 가슴에 만들어내는 파장은 가공할만 하다. 그것은 바로 이창동감독이 말하는 박하사탕이 말하는,그리고 전작인 초록물고기에서 말하는 그 이야기가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절대로 피할 수 없는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 바로 그것이 이창동 감독의 이야기이다.

 

더불어 그 동안 우리들이 광주항쟁을 돌아보며 가졌던 생각 즉 피해자 입장에서의 광주항쟁이라는 부분을 이창동 감독은 아주 절묘한 구성으로 부시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간의 광주항쟁의 영화들이 주로 피해자인 민중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진행했다면 이창동감독은 토벌대였던 그리고 고문전담 수사관이었던 주인공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의 처음에서 그리고 마지막에 그 가해자의 이야기가 다다르면 가해자도 그리고 피해자인 민중도 모두 격동의 역사에 쓰려져간 바로 우리들의 모습임이 드러나고 바로 그 순간에 더욱 쓰라린 아픔이 느껴지게 만들고 있다.

 

한 때 영화가 사회변혁의 수단이어야 하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상화된 세상의 단초들을 끊임없이 작품에서 내비침으로써 사회를 변혁시키는 기능을 영화가 수행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물론 깊은 고민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창동감독의 영화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창동감독의 영화가 그 같은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만큼 어느 의미에서 이창동 감독의 작품은 정치적이며 변혁적이다.


어느 누구도 박하사탕을 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영화적 견해와 취향(?)에 따라서의 나름데로의 의견들을 개진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박하사탕이 세상에 보여주는 역사는 바로 우리 모두의 과오이며 우리가 영원히 가슴속에 흉터로 안고 살아가야 할 영원한 아픔이기 때문이다. 박하사탕은 소주 한잔 마시며 어느 허름한 술집에서 눈물 흘리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2001년 1월 2일에 쓴 글: 이때 광주는 매우 슬픈 단어 중 하나였던 것 같다.

 


Posted by honeybadg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