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으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본 것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대학 1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본다는 것은 일본 애니메이션 애호가들보다는 한 참이나 늦은 것이었다. 작은 컴퓨터 모니터로 본 빽판이었지만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명작의 반영에 올려놓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가는 고전에 속하는 이 작품을 일본에서 개봉한지 16년만에 한국 개봉관에서 본다는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열혈 팬인 나에게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작은 모니터가 아닌 커다란 스크린으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던 나는 두 눈에 눈물이 맺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1. 미야자키 월드의 시작

동양적 휴머니즘과 자연 친화 사상으로 대표되는 미야자키의 일련의 작품으로 이룩한 미야자키 월드의 시작은 분명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였다. 단행본이나 TV시리즈, OVA에 기반한 애니메이션이 아닌 장편 애니메이션의 시작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이 작품을 통해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황금 듀오라고 할 수 있는 미야자키와 다카하타(추억은 방울 방울, 반딧불의 묘의 감독)의 완벽한 결합의 시작되었으며, 스튜디오 지브리의 탄생 배경이 되었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이 후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 후 작품의 주제 의식과 구성의 시작이 되는 작품이기에 더욱 그렇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미야자키의 월드를 이해하려면 처음으로 봐야만 하는 작품이다.

 

2. 자연친화사상과 동양적 휴머니즘

미야자키 하야오를 잘 모르는 사람도 그의 작품안에서 환경 보호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점은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도 다른 그 무엇보다 자연친화의 메시지는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불로서 대변되는 인간의 문명과 자연의 대결이 바로 그러하다. 이 후 <원령공주>에서는 철로서 대변되는 인간과 자연의 대결이 펼쳐진다. 그러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미야자키의 공력을 말하고 싶다. 그의 작품에서 시종일관 일관된 메시지를 던지는 것은 쉽지 않다. 자칫하다가는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고 개인사 적인 작품으로 침전하기 쉽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그렇지 않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미래의 이야기를 들려주더니 <토토로>에서 우리 시골의 정겨운 이야기로 바꾸어 이야기 하고 <원령공주>에 이르러서는 하드고어적인 냄새를 품기면서도 인간과 자연과의 숙명적인 싸움의 당위성을 첨부한다.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슴팍에 절실하게 꽂히도록 하면서도 침전하거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한결같이 고수하는 미야자키는 분명 세계사에 남을 대가임에 틀림이 없다.

 


미야자키의 작품의 또 다른 한 축은 바로 선과 악의 구도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에서 주인공과 갈등을 벌이는 대상, 즉 일반적으로 악으로 구성되어 있는 대상은 응징되지 않는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거신병으로 부해를 태우려고 하는 크샤나는 분명 일반적으로 보는 작품의 마지막에 응징이 되어야 하는 인물이지만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녀를 악으로 규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녀는 비록 주인공인 나우시카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이지만 인간으로서 부해의 독으로부터 생존하려고 하는 보통의 인간과 다르지 않다. <원령공주>에서도 사슴신의 머리를 훔친 인물을 응징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 처럼 미야자키는 완벽한 악이 등장하지 않으며 그를 또한 응징하지 않는다. 이것이 미야자키의 동양적-자연과 묶여져 있기에-휴머니즘이다. 이 부분에서 미,소냉전의 무너진 시점에서의 핵에 대한 은유와 이데올로기의 모호함으로 미야자키의 작품세계를 말하는 이도 있다.

 

미야자키의 개인적인 이력을 살펴보면 미야자키는 대학교 시절에 맑시즘에 빠져있었고 그런그의 좌파적 성향은 무척이나 열악했던 애니메이션 산업 속에서 노조위원장을 지내게도 했다. 그런 다소 투쟁적이고 정치적이던 그는 민족의 고유한 성향과 문화 그리고 정치시스템은 그 민족이 거주하는 자연에 기인한다는 논문을 보고 크게 고무되었고 이 후 그의 가치관이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 학설의 이름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처럼 미야자키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그리고 인간에게는 숙명적인 배경 아래에서 인간의 휴머니즘을 일관되게 이야기 하고 있다.

 

2. 그의 정치적 이상향

미야자키의 작품에서는 일관되게 공동체가 등장한다. <미래소년 코난>에서의 코난의 마을과 <바람계곡 나우시카>에서의 바람계곡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의 공동체, <토토로>에서의 시골마을 바로 그 마을은 미야자키가 바라는 정치적 이상향이다. 마을 소녀의 실종에 온 마을 주민이 달려 나오고 보살피던 할머니가 눈물짖는 정겨운 마을과 외부의 적에 의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힘을 함쳐 싸우는 바람계곡의 모습은 바로 그가 바라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보기에 개인 사유지가 존재하지 않고 생산수단인 토지를 공유하고 있는 듯 하다.


 

3. 공중부양씬의 그 황홀함

다들 아는 이야기지만 미야자키는 하늘을 나르는 장면을 주로 화면에 표현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바로 이 공중부양씬이다.-이 용어는 내가 개인적으로 지어낸 용어다^^- 나우시카에서 하늘을 나르는 나우시카의 모습을 보고 황홀하지 않을 이가 있을까? 그리고 <미래소년 코난>에서 하늘 위의 요새를 맨발로 달려가는 코난의 모습 <토토로>에서 토토로와 함께 하늘을 나르는 두 소녀의 모습과 고양이 버스를 타고 나르는 모습 정말 황홀하지 않을 수 없다. 애니메이션이지만 마치 나 자신이 바람을 가르며 머리카락을 날리며 공중을 나르는 절대 자유의 느낌을 갖게 한다.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이 살아 있음은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넘어서는 예술로서의 진가는 바로 이 공중부양씬에 있다. 인간적인 내음이 물씬 풍기지 않는가?

 

난 일본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아마도 난 보수적이고 닫힌 골수 한국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야자키를 만나게 된다면 그에게 진심으로 경배의 인사를 하고 싶다. 진심으로 머리 조아려 당신은 나에게는 세계 최고의 작가라고 말하고 싶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성전이라고 할 수 있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흥행에서 성공하고 있지는 못하는 듯 하다. 왜 일까? 작가주의의 최전방에 서 있는 작품이지만 그렇다고 상업성이 넘치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몇 가지 생각들을 이야기 하자면 아직 한국은 애니메이션에 성인 관객을 끌어들일 정도의 애니메이션에 대한 편견에 사라지지 않은 점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디즈니 애니메이션보다 다소 난해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어린이에게는 어려운 듯 하다. 실제로 극장에서 나와 함께 영화를 본 어린애가 관심을 가진 것은 우무였다.^^ 어린이에게는 인물 캐릭터 보다도 동물이나 매카닉이 어필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여간 요즘에 왜 한국에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흥행에 실패하고 있는지 고민 중이다.

 

요즘은 별 영양가 없는 영화글을 길게도 쓴다.

 
2001년 1월 10일에 쓴글


Posted by honeybadg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