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구 어딘가에 꼽아놓은 바늘에 하늘에서 단 하나의 줄이 내려와 꼽힐 확률로 우리가 만났다." 그렇다. 번지 점프의 그 생명줄은 어쩌면 그 줄에 매달려 있는 그와 그녀의 인연의 줄이었을지도... ... 그리고 현생에서의 인연의 줄을 끊음으로서 다음 세상에서의 인연의 줄을 기약한다.

 

1. 재기발랄함에 관하여

<번지점프를 하다>는 그 제목과도 같이 재기 발랄한 발상에서 출발한 영화다. 그 재기발랄함에 우리는 시종일관 웃고 무릎을 친다. 새삼 시나리오를 쓴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인다. 곳곳에 숨어있는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은 어떻게 저런 생각들을 해냈을까 하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한 잔 재미는 분명 <번지점프>의 강점임에는 분명하다. 천진한 우인의 태희에게 접근하기 -톱질씬, 엠티 출발씬, 바닷가에서 태희의 뒤를 따라가는 씬- 여관에서 서성이는 장면과 우인이 친구들과의 대화들 산행후에 숟가락 씬 등은 분명 금방 바다에서 건저낸 생선처럼 살아있다.

 

2. 우리의 사랑에 대한 상상과 추억 헤집기

비오는 날에 자신의 우산으로 뛰어 든 여자와의 사랑이라든가 첫 눈에 반한 사랑 등은 분명 우리가 상상 속에서 그려낸 사랑임에 분명하다. 좀 더 업해서 말한다면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잠자리를 하는 씬에서도 우리의 상상속의 그 설레임과 낭만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어느 누구든 그런 사랑을, 운명같은 사랑을 꿈꾸었을 것이다. 번지점프는 이 처럼 우리의 사랑에 대한 사랑을 우리 앞에 펼쳐보임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자극한다. 우인과 태희가 사랑하는 시간은 80년대이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추억을 여지없이 파헤친다. 지포라이터-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직접 만든-로 대변되는 증표와도 같은 선물에 관한 추억이라든지 일상속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들. 이 이야기는 이 후 우인이 태희의 솔메이트를 발견하는 단서로 주어짐으로써 다시금 우리의 추억을 헤집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있었던 음악 까지도. 거기에다 입영열차를 앞에 두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린 애달픔까지. 이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소소한 것들을, 이 모든 것을 멋지게 포장해서 <번지점프를 하다>는 우리의 사랑의 기억을 헤집는다. 멜로의 가장 큰 강점을 주인공과 관객과의 동질감이라고 한다면 동질감의 성패는 얼마나 주인공의 사랑에 관한 추억을 헤집을 수 있느냐가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도 <번지점프를 하다>는 성공하고 있다.


3. 솔메이트-그녀의 환생

영화의 극적인 반전은 우인이 선생님이 맡은 반에 태희의 솔메이트 즉 그녀가 환생한 남학생 제자가 있고 그를 우인이 발견한다는 설정이다. <번지점프를 하다>의 가장 큰 센세이션한 구성은 바로 이 솔메이트이다. 새삼 동성애의 점프를 시도한 감독의 고민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영화를 보는 나까지도 나중에 이야기를 풀어버리는 어떻게 습할까 걱정을 할 정도니 말이다. <번지점프>는 분명 아름다운 멜로이지 동성애를 담은 사회적 혹은 정치적 영화는 아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솔메이트라고는 하지만 동성애로서의 이야기를 풀어내기는 힘들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음습하게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이 부분에서 동성애는 음습하다는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라 동성애라는 이슈를 영화속에서 풀다보면 어두워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오해 없으시라- 물론 절대적인 솔메이트의 교감을 절실하게 그리지는 못했다. 단 영화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는 인우와 태희의 재회를 기차 창문으로 연출한 부분은 다행이라는 느낌을 받았고 감독에게 고맙기까지 했다. 하지만 인우가 태희를 알아보기까지 과정은 단순한 몇 개의 단서를 던져 줄 뿐이고 태희의 솔메이트가 우인과 자신의 과거를 찾는 과정도 상당히 도식적이다. 솔메이트라는 이색적인 소재를 가져온 것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까? 하지만 그 솔메이트로 인해서 새로운 멜로를 만들어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4. 구성에 관하여

<번지점프>는 시종일관 과거와 현제를 오락가락하며 단서를 던지고 다시 이를 풀고 이 과정을 계속적으로 반복하며 구성되어 있다. 예전에 이 게시판에서 쓴 적이 있지만 러브레터 이후로 상당히 어려운 멜로들이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다. 즉 스릴러적인 단서 주고 찾기 식의 구성에다가 시 공간을 왔다갔다하는 비선형적인 구성이 강한 멜로들이 그 어려운(?) 멜로들이다. 이제는 디테일한 플롯만으로 승부를 할 수 없는 듯 하다. 아예 신파로 가지 않는 이상 말이다. <번지점프>는 초반에만 선형으로 진행하더니 이후에는 시공간을 왔다 갔다하고 단서를 주고 찾기 식의 과정을 반복한다. 밋밋하지 않다는 점, 그리고 끊임없이 관객의 관심을 촉발할 수 있다는 점에는 좋은 듯 하나. <8월의 크리스마스>처럼 절절한 감흥을 주기는 힘든 듯 하다. 일회적이라고나 할까?

 

5. 올 최고의 멜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루> <번지점프를 하다> 중에서 최고를 꼽으라면 난 <번지점를 꼽고 싶다> 무엇보다도 <번지점프>의 재기발랄함에 가장 애착이 가기 때문이다. <나도 아내>처럼 루즈하지 않고 <하루>처럼 극도의 신파도 아니기에 말이다. 하지만 역시나 솔메이트와 인우의 교감의 수위는 낮고 가장 중요한 그 부분이 무너지면서 감흥은 반감된다. 이후 태희가 자신의 과거를 찾는 부분과 입영날에 오지 못한 것이 사고 때문이었다는 점. 결국에는 새로운 세상에서의 인연을 꿈꾸며 죽음을 택한다는 구성은 상당히 도식적이다. 만일 태희의 과거를 보여주지 않았다거나 용산역에서이 만남으로 끝을 맺었다면 좀 더 여백의 미가 있었지 않을까? 너무 친절하다는 점도 왠지 좀 거슬린다. 그럼에도 <번지점프를 하다>는 잘 만든 영화다. 솔직히 감독보다는 작가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추신: 이병헌이 아니었다면 이 역할을 이렇게 잘 소화해낼 배우가 있었을까?

나날이 성장하는 이병헌을 보며 괜시리 기분이 좋아진다.

2001년 2월 27일에 쓴 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달 후에 이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때는 그래도 영화가 참 많은 위안이었던 것 같다.

 


Posted by honeybadg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