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최고의 흥행 대박, JSA의 기록을 깰것인가? 연일 신문지상에 이슈화되고 있는 시류에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을 안 가질 수는 없었다. 한 영화가 이쯤되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과의 아주 신변적인 대화의 언저리에서 머무룰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일상사의 모든 이야기는 경상도 사투리도 점철되고 있으며 후배에게 뭐 하나 시키려면 "! 내가 형 시다말이가?" 또는 "니는 니대로 공부해라 나는 나대로 당구칠게"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등의 대사들이 거의 일상 용어화 되고 있다. 실로 영화의 힘은 강력하다는 사실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그런 <친구>와 난 대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다들 그런다고 하던데 친구에게 불현듯 전화해. "친구야! 술 한잔 하자"고 말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1. 곽경택 감독의 일기장을 엿보다.

<친구>는 곽감독의 아주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한다. 즉 자신의 이야기다. 영화 속 준석은 실재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이라고 하는 사실과 그 친구가 <친구>의 신문스크랩을 감방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있다는 기사들이 그러하다. 그런데 문제는 영화 <친구>가 자전적 즉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라는 점이다.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자기 친구들 이야기 술자리에서나 풀어낼 법한 이야기 영화로 만들어도 되는 것인가? 그 점에 곽감독은 영화 처음에 추억의 섬을 헤메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고 했다. 즉 먹고 살기 힘들어서 잊고 지내는 친구와의 추억에 젖어 지내는 우리들에게 바치는 영화라는 이야기다. 수긍이 간다. 즉 곽감독은 자신의 일기장속의 친구들의 이야기를 꺼내어 준석과 동수의 자리에 우리의 친구들을 하나 둘 배치하게 만든다. 그리고 아! 내 친구들에게 내가 너무 무심했지? 라는 반성과 함께 의리와 우정이라는 불타오르는 감정들을 가슴속에 던져준다. 그 감정에 우리는 감격해 할 수밖에 없다. 요즘에는 <친구>도 아주 전략적인 관점에서 기계적인 네트워킹이라고 하니까... ..

 

각박하고 살기 힘들어서 잊혀져 가는 우리들의 친구에 대한 노스텔지어가 현재 대중의 발길을 <친구>로 돌리게 하고 있다면 과연 영화 속 등장하는 준석과 동수는 노스텔지어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즉 준석과 동수는 내 친구 아무 아무개와 같은가 라는 말이다. 이 질문에 이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흔쾌히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친구아이가" 이 말로 모든 것을 용서하고 친구의 험담에 살짝 인상을 긁은 아우들을 굴리고, 고가도로에서 택시에 친구가 타고 있음을 보고 도로를 막고 친구야 외치며 달려오는 준석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고 자신의 친구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아니 자신이 또는 자신의 친구가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자신의 지나간 친구와의 우정을 멋지게 기억하고 싶은 또는 그렇게 만들고 싶은 우리들의 바램이 고스란이 담겨있다. 즉 자신이 준석이라면 친구를 위해 물불을 안가리는 친구이며 자신이 상택이라면 그런 친구가 자신에게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과 자신의 친구를 고스란이 옮겨 놓는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준석과 동수는 우리의 친구가 절대 아니다. 물론 그런 친구가 있을 수도 있다. 또는 그 비슷한. 하지만 자신의 친구 중에 조직의 보스나 회칼로 사람을 뜨는 친구가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어쩌면 우리들의 친구는 영화 <세친구>에서의 주인공들과 더 닮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는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력이 있다. 즉 우정의 미화! 바로 그것이다. 친구와의 우정과 의리를 미화시키고 싶은 또 그런 진한 우정을 하고 싶은 우리들의 마음을 자극하는 매력이 바로 우리가 곽감독의 일기장을 보고 가슴에 와닿은 것이 아닐까? 마치 우리가 영화 <첩혈쌍웅>에서 주윤발과 이수현의 교감에 찌르르 했던 것처럼... ...


2. 대사의 힘

<친구>는 분명 굉장히 잘 만들어진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그런 작품의 질은 흥행이라는 결과로 당연하게 나타나고 있다. 개인적으로 흥행이 잘 된 영화는 일단 작품의 분석을 뒤로 하고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잘 만들어진 영화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영화의 질은 많은 부분 훌륭한 대사에 기대고 있다. 부산지방의 사투리로 쓰여진 대사는 굉장히 색다른 맛을 갖게 한다. 만일 <친구>가 새끈한 표준어로 대사를 썼다면 아주 다른 영화가 나왔을 것이다. 부산지방의 사투리의 묘한 매력이 값지게 발산되고 있는 영화가 바로 <친구>일 것이다. 더불어 이 영화의 대사는 시쳇마로 장난이 아니다. 롤러장에서 상택을 괴롭힌 녀석들을 혼내준 후에 준석의 대사, 가출한 상택에게 집 옥상에서 들려주는 준석의 대사, 준석 아버지 장례장에서 준석과 동수의 대화, 카드를 사러 나온 준석이 상택에에 하는 대사, 마지막 준석과 동수의 대화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장면에서 대사는 실로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잘 짜여져 있고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박힌다. 물론 유오성과 장동건의 연기가 워낙 훌륭해서 이기도 하지만 <친구>의 최고의 매력은 적시적소의 대사일 것이다.

 

3. 운명론적인 세계관

단순한 자신의 친구와의 과거지사라는 영화에 세계관을 본다는 것이 좀 우수울 수도 있으나 왠지 영화 <친구>의 세계관이 그리 썩내키지는 않는다. 영화 <친구>는 왜 그 친구들이 그렇게 살게 되었는지 왜 준석이 동수를 죽일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치밀한 탐색보다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식의 세계관을 가진다. 영화 <세친구>에서처럼 사회와 환경의 소외에 대한 이야기도 없고-물론 동수가 학교에서 자퇴하는

장면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는 동수가 이제 확연하게 다른 삶을 살게된다는 복선이라는 성격이 더 강한 듯 하다. 동수의 아버지가 장의사이기에 그런 인생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도 가능하다. 하지만 장의사나 청소부의 아들은 다 일탈하고 다 건달이 되는 것인가?- 운명대로 살았던 친구들의 과거를 쫓아간다. 준석의 대사에서도 "니는 니대로 살아라 나는 나대로 살게" 같은 세계관이 바로 <친구>의 세계관이다. 상택의 질문에 준석의 "동수도 내도 건달아이가? 라는 대사에서도 그런 세계관은 포출된다. 영화 <친구>는 예초에 준석과 동수 상택이 왜 그런 다른 길을 걷고 비극으로 치달았는지 하는 문제보다는 내 친구들은 그렇게 살았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


 

영화 <친구>는 분명 시기적절하게 현 시기 남자들의 가슴속의 친구와 우정이라는 화두를 아주 감각적으로 낚아올린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친구>를 수작, 걸작의 반열에 올려놓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어쩌면 영화 <세친구>가 다른 방향에서 이야기를 접근하고 있지만 그 모습이 우리의 친구의 모습에 더 어울린다. 희망의 부재속에 그리고 소외속에 살아야 했던 나와 나의 친구들이 더 친구를 아련하게 한다. 그렇지만 영화 <친구>를 보고 오랜만에 친구에게 전화해 "친구야 술 한잔하자" 라고 한다면 그리고 우정이라는 단어를 자신의 인생의 단어장에 앞쪽에 올려놓게 되었다면 이 영화는 그만한 가치를 가진다고 본다.

 

 영화를 보고 친구와 술을 먹었지만 "친구야, 술 한잔 하자"고 말은 못했다. 어쩌면 난 아직도 내 마음을 말하지 않고 친구가 알아주길 바라는지도 모른다. 언제 한번 날 잡아서 이제는 "친구야 술 한잔 하자"고 말하고 달려가야겠다.

2001년 5월 5일에 쓴 글: 그래 친구는 그때 정말 대단했어.

Posted by honeybadg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