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며 우리는 항상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영리함을 강요받는다.단순한 일에도 있는 머리, 없는 머리를 사용해 최상의 결과를 뽑아낼 것을 강요받고, 보통 혹은 평균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언행을 보일 때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루어야 한다. 주위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계량화 할 수 있는 금전적인 손실을 감수해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 이 영리함은 이상한 개념으로 치환되게 된다. 즉 남을 신뢰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정확하게 계산하고, 자신의 원하는 바를 이루어냈을 때 그는 영리하다는 평가를 얻곤 한다.반대로 이야기 하자면 친구를 믿고 보증을 서주거나,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영리함에서 거리가 먼 그리고 확장되서 IQ가 모자라는 개념으로 인식되게 된다.가끔은 이와 같은 과정이 너무 복잡해서 차리라 나 자신이 영리하지 않다는 커밍아웃을 하고도 싶어진다.이와 같은 상황에서 보면 샘은 영리함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일반적인 척도로서 제단 된 그의 IQ 7살 어린이의 수준과 같으니 말이다.그런데 수리력, 논리력과 같은 지적인 영역만을 측정하는 IQ가 산출해 내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인간적임을 형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이다.즉 희생적이라던가, 책임감이 강하다던가와 같은 인간으로서 가져야할 요소들은 산출이 불가능하다.단언하건데 그러한 영역들까지 고려해서 산출한다면 샘의 IQ는 보통 사람의 수준을 휠씬 웃돌 것이다. 


하나의 재미나는 이야기가 있다.한 유치원에서 아빠를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아빠의 자랑거리를 신나게 이야기를 했는데 한 아이는 시무룩하게 앉아 있었다고 한다.의아한 선생님이 그 아이를 지목해서 아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라고 하니 그 아이는 다음가 같이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저의 아빠요? ... 사람은 좋죠."처음에는 이외의 발언에 꽤 웃었는데 돌아서 생각해 보니 꽤 잔인한 말이라는 생각을 했다.즉 사람은 좋다를 형성하는 참함이라던가 선함이라던가와 같은 개념은 현재의 우리에게 자랑거리가 아니라 어떤 핸디캡, 현 시대를 살아가는데 거세되어야 할 개념이 되어버린 것이니 말이다.

 

 

이 영화에서 재판장을 떠올려보자. 지적인 수준의 최상을 나타내는 법제도가 현실적인 효력을 발휘하는 곳이 바로 재판장이다.그곳에서는 검사와 판사 변호사가 서로의 지적능력의 극한을 넘나들며 호화찬란한 지적언어가 난무한다. 그 재판장에서 증인을 안아주는 샘의 행동과 친구들의 호의에 감사하는 샘의 언어는 그야말로 바보같음의 결정체와 같다. 재판장은 단순하게 이야기해서 인간다움에 배반되는 행위에 대한 평가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그 평가에 있어서 법은 평가에 대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샘은 가장 인간다운 존재임에도, 딸 루시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간다움의 발현과 딸 루시의 애정에 대한 표현은 재판결과의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단 한가지의 이유로 그렇게 작용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평균적인 행동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이 지점에서 우리는 영리하다의 개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I am Sam]은 농도 100%의 리얼리티를 갖고 있는 영화는 절대 아니다. 무척이나 작위적이고, 통상적으로 이야기하는 신파의 극치의 지점에 포진한 영화이기도 하다.하지만 그로 인해 [I am Sam]이 전하는 이야기 자체를 평가절하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것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뒤틀린 현재의 모습에 절대유효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무책임한 결과로 탄생한 아기를 화장실에 버리고, 그릇된 자식의 안위를 위해서 온갖 비합법적인 기재를 동원해서 잘못을 숨기며, 자식을 자신을 형성하는 가치에 정확하게 부합시키기 위해 많은 것을 강요하며, 인간적인 영역보다 지적인 영역을 발전시켜 다른 이들보다 경쟁력을 갖게 하기 위한 교육에 집중하는 현재에 일갈 (一喝)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샘이 인간적이기 때문에 루시에 대한 애정이 보통의 부모보다 강하다는 것은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샘과 같은 상황에 처한 어느 부모라도 샘과 같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부모는 거의 없다.그런데 샘은 대부분의 부모와 확연하게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식에게 올바른 부모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영화 중에 루시가 검사, 변호사, 그리고 아동보호국 관계자들의 심문을 받는 장면이 있다. 이 때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루시는 샘에게 유리하게 거짓말로 답변을 한다.그 모습을 TV 모니터로 보고 있던 샘은 그렇게 말한다."진실을 말해 루시"물론 샘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지는 모른다.그렇지만 샘은 결코 자식이 진실을 감추고 거짓말을 해서 원하는 바를 얻는 것에 납득할 수 없다.그리고 상황이 불리할지라도 진실을 말하라고 루시에게 말한다.대부분의 부모라면 루시가 거짓말을 해서 재판에 승소하기를 바랄 것이다.그리고 그것이 바로 영리함이라고 생각할 것이다.하지만 그 순간 자식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현명한 처세라고 인식하지는 않을까?즉 영리하게 될지는 모르나 인간적임과는 멀어지게 되지는 않을까?7살의 지능을 가진 샘은 정확하게 자식에게 있어서 부모의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물론 아직 부모가 되지 못한 나 또한 샘처럼 행동할 자신은 아직 부모가 아니어도 갖기가 힘들다.하지만 우리는 너무 자식을 너무 작게만 사랑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어쩌면 샘의 사랑이 더 큰 자식에 대한 사랑은 아닐까? 

 

비견한 예를 하나 들어보고자 한다.안중근 의사가 이토오를 저격하고 옥중에 있을 때 그의 어머니에게서 서신이 하나 왔다고 한다. 그 서신에는 네가 사형이라는 재판의 결과에 대해 항소를 하면 너 혼자가 아니라 조선이 일본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니 그냥 형을 받으라고 적혀있었다고 한다.어느 부모가 자식의 목숨이 시간에 달려 있는데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하겠는가?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마도 안중근 의사의 결연한 죽음에 대한 의중을 안 어머니가 어머니에 대한 안중근 의사의 불효에 대한 죄스러움을 덜기 위해 더 큰 사랑을 선택한 것이지는 않을까?

 

비록 [I am Sam]이 작위적이고 신파라고 하더라도 부모라는 명제에 대한 절대유효한 가치를 던져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영화는 분명 엔터테인먼트이다. 엔터테인먼트에는 다양한 의미들이 내포된다. 작게는 시각적 즐거움에서부터 문화이기에 형성되는 의미까지 따양한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그런데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엔터테인먼트는 물질적인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철저하게 수용자의 정신적인 영역에서 기동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를 컨트롤하는 가치관에 실로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속성에서 영화가 청소년 건강에 유해하다는 이야기들과 다양한 인류문화학적 분석의 틀을 통해서 분석이 가능하고 담론이 형성되는 것이다.이와 같은 점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영화는 교육의 기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역사적으로도 소련과 동구권이 국가들이 인민민중의 선전, 선동과 교육의 도구로 사용되었기도 하니 말이다.

 



즉 영화를 통해 영화를 접하는 관객에게 훌륭한 메시지 혹은 주장을 전달하고 그를 통해서 관객의 가치관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I am Sam ]은 철저하게 계산된 영화이지만 부모와 자식간의 정체성이 무너지고, 그 결합의 고리가 파괴되는 현재의 상황에 꼭 필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본다.영화를 보는 부모 그리고 이후에 부모가 될 우리들은 샘의 진정성을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아빠가 된 지금의 나는  이 영화를 또 어떻게 보게 될까?  


Posted by honeybadger :